왕의 목을 치다

래디컬(Radical) 바이올로지 2008/07/06 08:18 Posted by 김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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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분명 군중을 어리석다 여기는 엘리트적 사고의 인물이다.
군중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40만의 시민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단 한마디 언사가 없다. 내성이 생긴 것이다. 60여 일을 하루가 멀다하고 모이는 시민들에게서 눈을 돌린 것이다. 더이상 무섭지 않은 것이다. 광주사태와 6.10 항쟁과 같이 역사를 진전시킬 민중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서울시장 당시 청계천과 버스개혁을 추진할 때 느꼈던 반발이 조금 더 커졌을 뿐이라 여기는 것이다.

청와대를 움직이는 여론조사라는 게 보통 1,000명을 대상으로 한다는데 크게 잡아 10,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해도 대한민국 인구의 0.02%에 불과하다. 적게 잡아 광장에 20만명이 모였다 치고 그것을 청와대가 신뢰하는 여론조사의 표본수집과 비교해도 대한민국 인구의 20배가 넘는다. 아무리 내성이 생겼다 해도 이러한 숫자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1세기 그 어떤 선진국에서도 이렇게 많은 수의 시민이 모여 한 목소리를 내는 일이 드물다는 역사적 통찰력이 필요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다는 말인가. 군중이 무지몽매하여 욕을 쳐먹어가면서도 꿋꿋이 지켜나가야 할 그 가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공기업을 선진화한다는 명목으로 국민의 복지를 후진화시키고, 공기업의 선진화란 시스템적 효율성을 재고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코드인사들을 낙하산식으로 살포하면서, 언론을 장악해 모든 국가적 행위를 통일화하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박정희 시대를 지나며 충분히 보아왔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경제가 발전하기엔 대한민국이라는 시장은 너무나 광대하고 자유롭다. 대한민국은 이미 동네 조기축구단이 아니라 뉴캐슬 유나이티드나 리버풀에 가깝다. 이들을 다루는 데에는 상이한 리더쉽이 요구되는 것이다. 대통령은 이러한 점을 놓치고 있다. 대통령이 인적장막으로 40만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역성혁명으로 이루어질지라도 들려주어야 한다.

유교가 아무리 보수적인 사상이라 해도, 모든 사상은 상황에 맞추어 진화하기 마련이어서 누가 언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진보도 보수도 될 수 있는 것이라 본다. 바이블이라는 텍스트 하나를 두고도 민중신학과 보수기독교회들이 대립하는 것과 같다. 아마도 유교의 역사에서 가장 개혁적이라 할 만한 인물이라면 맹자일 것이다. 그를 진정한 보수로 보아도 무방하고 역시 그것은 상황에 따른 해석의 문제다. 다만 지금 우리가 취해야 할 스탠스는 맹자의 역성혁명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맹자는 겁이 없다. 그는 "仁을 해친 者를 도적이라고 하며, 義를 해친 者를 깡패라고 한다. 도적 깡패는 한 필부일 뿐이니, 한 필부인 紂를 죽였단 말은 들어봤어도 임금을 죽였단 말은 못들어봤다."라 했다. 역위(
易位)라 하여 "반 복해서 간(諫)해도 듣지 않으면 임금을 갈아치워"도 된다 했다. 맹자가 지닌 태생적 한계는 그 혁명의 주체가 도덕성을 지닌 다른 제후라는 점에 있다. 이것이 모든 유교사상이 지닌 보수로서의 태생적 한계다. 그 어떤 유교사상도 국가의 정치사상으로 바라볼 때 국민과 군주의위계질서라는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구약이 지닌 태생적 한계와 같다. 결국 예수와 같은 인물에 의해 혁파당하지 않는 한 그것이 유교가 지닌 최대의 약점이다. 결국 유교는 시대를 따라 발전하지 못한 종교다.

그래서인가. 노무현 정부에 대한 향수병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정말 심심치 않게 그런 글들이 블로그를 타고 전파되고 있다. 그것은 역성혁명이고 작금이 촛불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촛불의 주체는 노무현이라는 또 다른 제후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이요 민중이다. 그 권력을 또 다른 제후에게 넘겨줄 요량이라면 나는 촛불을 끄라고 요구하고 싶다. 40만이 모여 하는 짓이 그런 반발심리 뿐이라면 그것은 홍준표와 청와대가 국민을 바라보는 방식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뿐이다.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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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 년 전 조선의 어떤 문인이 던진 말이다. 서양에서 장 자끄 루소가 인간의 불평등을 고민하기 140년 전에 허균은 이미 맹자를 벗어나 민을 혁명의 주체로 보고 있었다. 어떤 이는 그를 최초의 천주교 신자라고도 말한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예불을 드리다 귀양을 가기도 했고, 도대체 그 사상을 뭐라 규정할 수도 없는 괴물, 그것이 교산 허균이다.

혜강 최한기의 책들을 접한 이후 참으로 간만에 고전국역본을 읽는다. 교산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11권의 "논(論)"은 가뜩이나 소설이나 시와 친하지 못한 내가 조선 지식인들의 책을 어디까지 읽어가갈 수 있을런지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것이 최한기의 책으로 마지막일 것이라 여겼는데, 교산의
"논(論)"은 최한기의 300년 전 판박이다.

'학론'으로부터 시작해서 유명한 '호민론'과 '유재론'을 거쳐 '이장곤론'으로 마무리되는 총 12론은 가슴에 아로 새겨둘 만한 주옥같은 명문들이다.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라는 말은 '호민론'의 첫 문장이다. '호민론'은 '정도전과 권근에 대한 논' 바로 앞에 등장하는 그러니까 12론에서 후반의 4개의 인물론이 등장하기 바로 전, 즉 그가 가진 사회사상의 종합판라 할 수 있다. 기실 호민론은 '소인론'이나 '유재론'등과 연관지어 읽어야 허균이 꿈꾸었던 이상사회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뭐 그건 대충 '홍길동전'으로 대신하겠다. 건방지게 역사학자도 아니면서 너무 자세한 분석을 하려는 듯 해서.

그래도 한마디만 하자면 교산이 '호민론'의 서두에서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을 나누어 소개하고 있고 현재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호민에 가깝다고는 할 수 있어도 글은 끝까지 읽어봐야 하는 것이다. 그가 결국 민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등장한다고 경고했던 세력은 견훤이나 궁예와 같은 역사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독서광이었던 그가 역사를 모르는 건 아니었을 테고, 굳이 견훤과 궁예를 예로 든 이유는 그 또한 맹자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함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서얼제도의 철폐와 같은 평등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면에서 그는 분명 맹자보다 한 걸음 진보한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이번 7월 5일 촛불집회에서 벤데타 가면이 등장했다던데 홍길동 가면은 안되는가 하는 생각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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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향수병에 걸린 이들이 걸어 놓은 저 동영상은 이 땅에서 단 한번도 민중에 의한 혁명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노무현의 역사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좋은 역사적 통찰력이다. 분명 정치는 글이 아니라 말로 하는 것이고 일종의 선동인 것이다. 허나 나는 한홍구 교수의 글에 서 더 큰 감동을 받는 텍스트 매니아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리고 한홍구 교수의 글은 시민혁명 없이 민주주의를 쟁취한 이 땅의 기묘한 공존을 되새기게 해 주는 힘이 있다. 결국 촛불집회도 한홍구 교수의 분석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맹자와 허균을 거쳐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다시그 벗어나야만 할 우리의 한계인 것이다.

40만이 모여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통령은 허균의 뜻 정도는 이해하는 자일게다. 서얼의 철폐와 같은 평등주의는 이 땅에 구현되었다고 믿는 자일게다. 그리고 맹자의 사상도 이해하는 자일게다. 결국 그에게 생긴 관성은 아래에서 위로의 혁명이 없었다는 이 땅이 지닌 역사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오만함이다. 그것이 한홍구 교수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이며, 노무현이라는 대안에서 찾아지지 않는 진정한 혁명의 뜻이다.

소고기로 정부를 쓰러트릴 수는 없다. 우리는 대통령과 정부가 우리에게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전까지 매우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속되는 촛불은 지친다. 촛불을 마냥 거두고 있을 수도 없다. 이제 촛불의 방향을 사회 각 분야로 넓혀야 할 때다. 공기업의 선진화라는 명목하에 벌어지는 사태들과, 대운하의 잠정적인 보류와 그리고 언론을 장악하려는 시도에 맞서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전략으로 맞서야 한다. 교육감 선거에서 정권을 심판하는 것은 그 하나의 전략이다. 우석훈의 말처럼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주민소환제를 활용해서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일도 게을리 해선 안된다. 촛불에서 얻어진 동력으로 국민소환제를 입법시키고, 소고기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

보수던 진보던 정치인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국민의 뜻이 아니라 표심이다. 결국 그들의 사활은 표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촛불은 진정으로 국민의 생존이 위협에 처했을 때 언제든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는 맹자의 말처럼 왕의 목을 치고, 허균의 말처럼 호민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한홍구의 말처럼 진정한 시민혁명을 이루는 날이 될 것이다.

혁명이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죄다 서양적인 이미지들 뿐이다. 만약 우리에게 혁명이 있었다면 또 온다면 그것은 어떤 이미지일까를 고민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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